제1형 당뇨 환자로 구성된 비영리단체 'Open APS', 인공췌장 제작 기술 무료 배포
미국당뇨병학회 연례학술대회서 혈당 조절 및 환자 만족도 결과 발표
삼성서울병원 김재현 교수 "우리나라는 당뇨병 교육 수가부터 마련돼야"

[메디칼업저버 박선혜 기자] 환자들이 의료기기 회사와 의료진으로부터 의료 서비스를 받던 시대를 지나 의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패러다임 변화가 일고 있다.

새로운 의료기술이 실제 임상에 도입되기까지 여러 난관이 있기에, 환자들은 수혜자 입장에서 마냥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변화를 이끌어가겠다는 움직임이다. 

그 중심에 있는 이들이 평생 인슐린에 의존해야 하는 제1형 당뇨병 환자다.

이들은 새롭게 개발된 '인공췌장(artificial pancreas)'으로 24시간 동안 혈당을 지속적으로 측정할 수 있고, 혈당이 일정 수준에 도달하면 인슐린 분비가 차단돼 매일 여러 번 인슐린을 투약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해결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삶의 질 개선도 가능하다.

그런데 제1형 당뇨병 환자들이 의료기기 회사에서 개발한 인공췌장이 아닌 환자가 직접 인공췌장을 만들어 사용하는 모습이 국내·외에서 포착된다. 이름하여 'DIY(Do It Yourself) 인공췌장'이다.

'#WeAreNotWaiting'…기다리지 않는 1형 당뇨 환자

DIY 인공췌장은 전 세계 제1형 당뇨병 환자들이 내건 '우리는 기다리지 않겠다(#WeAreNotWaiting)'는 슬로건과 뜻을 함께 한다. 

인공췌장은 실시간 연속혈당측정기의 정확도가 발달하고 전임상연구를 통해 알고리듬이 빠른 속도로 개선되면서 급격한 발전을 이뤘다.

문제는 새로운 기술을 반영한 인공췌장이 임상시험을 거쳐 승인받고 실제 환자에게 사용되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는 점이다. 게다가 신제품은 기존 제품보다 가격이 비싸 모든 환자가 혜택을 받을 수 없다.

2016년 미국식품의약국(FDA)이 인공췌장으로 '미니메드 670G'를 승인했지만 미국 내 가격이 약 8000달러(한화 약 926만원)로 비용이 비싸다는 한계가 있으며 국내에는 아직 도입되지 않았다.

다나 루이스의 'Open Artificial Pancreas System' 관련 Youtube 강연 캡쳐.
▲다나 루이스의 'Open Artificial Pancreas System' 관련 Youtube 강연 캡쳐.

이를 해결하기 위해 2015년 제1형 당뇨병 환자이자 미국 엔지니어인 다나 루이스(Dana Lewis)를 주축으로 제1형 당뇨병 환자와 부모로 구성된 비영리단체 'Open APS(Open Source Artificial Pancreas Systems)'는 현재 승인을 받아 시판 중인 의료기기를 자체 기술로 개조한 DIY 인공췌장을 고안한다.  

시판되는 인공췌장처럼 연속혈당측정기와 인슐린 펌프로 구성됐고, 혈당 변화에 따라 자동으로 속효성 인슐린 기저 용량을 조절하는 초소형 컴퓨터 '라즈베리 파이(Rasberry Pi)'가 연결됐다.

Open APS는 여기서 나아가 당뇨병 환자라면 DIY 인공췌장을 직접 만들 수 있도록 제작 기술을 무료로 배포한다. 사용자는 클라우드에 공유된 알고리즘을 자유롭게 이용하고 수정해 사용함으로써 '마냥 기다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행동으로 보여주게 된다. 

서울대병원 조영민 교수(내분비내과)는 "환자들이 만든 인공췌장이 언급된다는 것은 당뇨병을 치료하는 시장에 플레이어가 한 명 더 들어왔다는 것"이라며 "DIY 인공췌장은 당뇨병 치료에 절박한 환자자조그룹, 특히 엔지니어들이 주도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ADA 학술대회서 DIY 인공췌장 관련 연구 등장

DIY 인공췌장은 2016년 미국당뇨병학회 연례학술대회(ADA 2016)에서 이슈로 떠올랐고 최근 열린 학술대회의 포스터 세션에도 관련 연구 결과들이 선을 보였다. 

2016년에는 Open APS 사용자 40명 중 설문조사에 참여한 18명의 자가보고 데이터 분석 결과가 발표됐다. 최종 결과에 따르면, 환자들의 평균 당화혈색소는 7.1%에서 6.2%로 감소했고 혈당이 80~180mg/dL 범위에 머무는 시간은 58%에서 81%로 23%p 증가했다.

ADA 2018에서 공개된 후향적 연구 결과에서는 DIY 인공췌장 사용자 20명의 평균 당화혈색소가 사용 전 6.4%에서 사용 후 6.1%로 개선됐다. 혈당이 70~180mg/dL 범위에 머무는 시간도 75.8%에서 82.2%로 증가했다.

이와 함께 이날 학술대회에서 건국대 충주병원 최수봉 교수(내분비내과) 연구팀은 국내 제1형 당뇨병 환자 20명을 대상으로 연속혈당측정기, 인슐린 펌프, Open APS 알고리즘을 활용해 평균 6개월 혈당을 조절한 결과를 발표했다. 결과에 의하면, 평균 당화혈색소가 감소했고 정상 혈당이 안정적으로 유지됐다. 

올해 ADA에서는 DIY 인공췌장을 사용한 제1형 당뇨병 환자 80명의 데이터 분석 결과가 발표, DIY 인공췌장으로 혈당을 안정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했다. 

앞선 결과와 유사하게 평균 당화혈색소는 6.4%로 조절됐고 혈당이 70~180mg/dL 범위에 머무른 시간은 77.5%로 조사됐다. 

이에 더해 미국 내 DIY 인공췌장 사용자 10명 중 9명은 이 기기가 안전에 문제가 없다고 느끼는 것으로 파악됐다. 트위터, 페이스북 등 SNS를 통해 DIY 인공췌장을 사용하는 제1형 당뇨병 환자를 대상으로 2주간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89%가 DIY 인공췌장이 안전하거나 매우 안전하다고 답했다.

FDA '인슐린 과량투여' 사례 경고…문제 발생 시 책임은 환자에게

하지만 DIY 인공췌장의 안전에 대한 우려는 남아 있다. DIY 인공췌장은 의료기기로 분류되지 않아 FDA 등 보건당국의 규제를 받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DIY 인공췌장에 사용하는 연속혈당측정기와 인슐린 펌프는 FDA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여기에 사용하는 알고리즘은 허가받지 않았다. 이 알고리즘에 익숙하지 않은 환자가 DIY 인공췌장을 사용해 문제가 발생한다면 이에 대한 책임은 온전히 환자가 지게 된다. 

또 최근에는 DIY 인공췌장 사용 후 안전성 문제도 보고되는 상황. 지난 5월 FDA는 DIY 인공췌장 사용자 중 갑작스럽게 인슐린이 과량투여되는 사례가 1건 보고돼 DIY 인공췌장 사용에 주의가 필요하다고 경고했다.

전문가들은 DIY 인공췌장이 연속혈당측정기와 인슐린 펌프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환자에게 도움이 되며, 이를 잘 알지 못하는 경우 오히려 혜택보다 위험이 커진다고 우려한다. 

예로, 조립형 PC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사용자는 정보를 찾아보고 PC를 직접 조립해 우수한 성능을 가진 맞춤형 PC를 가질 수 있다. 반면 조립형 PC에 대한 이해도가 없이 따라 한다면 사용자는 오히려 손해를 보게 된다.

즉 환자가 연속혈당측정기와 인슐린 펌프를 사용해 스스로 혈당 조절이 가능한 수준이 돼야만 DIY 인공췌장을 안전하고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다.

삼성서울병원 김재현 교수(내분비대사내과)는 "연속혈당측정기와 인슐린 펌프를 소형 컴퓨터와 연결했다고 해서 모든 제1형 당뇨병 환자가 DIY 인공췌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며 "각 기기를 스스로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환자들이 DIY 인공췌장을 사용해야만 효과가 나타나고 당뇨병 관리에 도움이 된다"고 강조했다. 

국내 DIY 인공췌장 사용자 약 50명…제대로 사용하는 환자는 더 적어

그렇다면 우리나라에서 인공췌장을 만들어 제대로 사용하는 환자들은 어느 정도일까?

김 교수에 따르면, 전 세계에서 DIY 인공췌장 사용자는 1000여명, 국내에서는 약 50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이 중 DIY 인공췌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환자는 극소수다. 

우리나라에서 연속혈당측정기 사용자는 1000여 명이고 꾸준히 사용하는 환자는 500여 명으로 절반에 그친다. 

이를 비춰보면 연속혈당측정기를 사용하는 제1형 당뇨병 환자 100명 중 5명이 DIY 인공췌장을 사용하는 셈이다. 여기서 스스로 DIY 인공췌장을 사용할 수 있는 환자를 파악하면 그 수는 더 줄어든다는 게 김 교수의 전언이다. 

김 교수는 "DIY 인공췌장 사용자 50명 중 스스로 사용할 수 있는 환자는 5명 정도"라며 "즉 DIY 인공췌장을 제대로 사용할 수 있는 사용자 5명에게 나머지 환자들이 의존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설명했다. 

"당뇨병 교육 수가 부재…환자 간 당뇨병 관리 격차 벌어지고 있어"

▲2016년 FDA가 인공췌장으로 승인한 ‘미니메드 670G’. 이 기기는 14세 이상 제1형 당뇨병 환자에게 쓰인다. <사진제공: 메드트로닉>
▲2016년 FDA가 인공췌장으로 승인한 ‘미니메드 670G’. 이 기기는 14세 이상 제1형 당뇨병 환자에게 쓰인다. <사진제공: 메드트로닉>

아직 인공췌장이 도입되지 않은 우리나라에서 제1형 당뇨병 환자가 직접 인공췌장을 만들고 사용하기 어려운 이유는 당뇨병 교육을 진행하기 어려운 환경에서 찾을 수 있다. 

올해부터 연속혈당측정기에 보험급여가 적용됐으나 관련 교육에 대한 보상체계는 없다.

제1형 당뇨병 환자가 인공췌장 사용 단계로 넘어가기 위해서는 연속혈당측정기와 인슐린 펌프를 능숙하게 사용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당뇨병 교육이 필수다. 하지만 짧은 시간 안에 많은 환자를 진료해야 하는 의료진뿐 아니라 병원 입장에서는 교육에 대한 보상체계가 없어 당뇨병 교육을 위한 시스템 구축이 어려운 실정이다.

김 교수는 "제1형 당뇨병 환자를 위한 좋은 의료기기가 국내에 도입됐는데 왜 사용하지 못하냐는 목소리가 있다"며 "하지만 기기가 있다고 당뇨병 관리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당뇨병 관리) 시스템부터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비용 대비 효과를 따지는 북유럽에서는 당뇨병 교육에 보험을 적용해준다. 게다가 연속혈당측정기와 인슐린 펌프에 충분한 이해가 있는 환자가 인공췌장을 사용하면 좋다는 가이드라인도 마련됐다"면서 "반면 우리나라는 제1형 당뇨병 환자 1명을 교육할 바에 99명 환자를 진료하는 게 좋은 시스템이다. 국내 의료진들이 당뇨병 교육에 관심을 가질 이유가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김 교수는 당뇨병 교육의 부재로 교육받지 못한 환자와 기기를 잘 사용할 수 있는 환자 간 당뇨병 관리 격차가 더 벌어지는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그는 "연속혈당측정기에 보험이 적용됐지만 실제 사용하고 혜택을 받는 환자는 과거 해외 직구를 통해 사용했던 환자들이다. 이들은 연속혈당측정기를 제대로 사용하고자 스스로 공부했기에 기기를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면서 "이 외 환자들은 기기 사용에 대한 교육을 받아야만 효과를 볼 수 있다. 환자 교육에 상당 시간을 투자하고 당뇨병 관리에 대한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국내 당뇨병 교육 수준을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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