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부 정윤식 기자

협상과 흥정은 특별한 구분 없이 사용되고 있는 단어이나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면 다소 차이가 존재한다.

협상(Negotiation)은 타결의사를 가진 당사자 여럿이 양방향 의사소통을 통해 상호 만족할만한 수준으로의 합의를 이르는 과정으로 정의된다.

반면 흥정(Bargaining)은 개인과 개인 사이에 매매 등과 같은 상호작용을 가리키는 말로, 거래 혹은 매매와 비슷한 뜻이다.

여기서 '특허사용 설명처'라는 책의 문구를 인용해 한발 더 나아가 자세히 알아보자. 

협상은 갈등의 본질과 상대방의 숨은 의도를 파악해 나에게는 중요하나 상대방이 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을 양보 받고, 상대방에게는 중요하나 나에게는 덜 중요한 항목을 양보해 총 가치(Total Value)를 높이는 과정이다.

흥정은 나와 상대방이 줄다리기를 통해 최종 입장을 정하는 것으로 최선의 합의는 중간지점밖에 없으며 이 중간지점마저도 어느 쪽도 만족스러운 상태가 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협상은 상대방으로부터 배려와 양보를 받기 때문에 서로 존중하고 신뢰하는 관계가 형성되나 흥정은 회수가 거듭될수록 가치한정 딜레마에 빠져 상대방이 고집불통으로 보이기 때문에 서로 존중하지 않고 미워하게 된다.

2020년도 요양급여비용 흥정이 끝났다.

이번 흥정은 역대 최장 시간 동안 이뤄진 흥정으로 기록됨과 동시에 가장 비효율적인 시간을 소비한 흥정으로도 기억될 전망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재정운영위원회 소위원회와는 추가재정소요액 흥정을, 공급자단체와는 인상률을 두고 흥정을 벌였다.

흥정의 당사자는 건보공단과 공급자단체인데 건보공단이 재정소위를 만나 할애하는 시간이 공급단체와 만나서 얘기하는 시간보다 많았으며 이 때문에 이번 수가흥정은 자정을 넘어서까지 지지부진 했던 것이다.

건보공단이 공급자단체와의 흥정을 잠시 중단하고 재정소위와 최종적인 의견조율을 끝낸 새벽 4시가 돼서야 대한병원협회를 시작으로 도장 찍는 소리가 들렸고 이후 나머지 단체도 연이어 체결에 나섰다.

결국 17시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흥정다운 흥정이 이뤄진 시간은 길어야 고작 3시간 30분가량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3시간 30분조차 일찍이 사인을 하고 집으로 돌아간 병협을 제외하고 나머지 공급자단체들은 단 0.1%의 인상률이라도 더 가져가기 위해 언제나 그랬듯 '버티기 모드'에 돌입했던 시간이다.

공급자단체들과 건보공단이 이 같은 소모적인 시간을 보내고 버티기만 일삼은 이유는 둘 간의 본격적인 만남 이전에 확정되지 않는 '추가재정소요액(밴드)' 때문이 크다.

이 밴드가 정해져야 건보공단이 공급자단체들에게 인상률을 제시하고 공급자단체들도 이를 받아들일지, 새로운 인상률을 제시할지 결정하는데 올해 유독 재정소위가 밴드 설정에 보수적이었던 것.

최초, 이번 밴딩은 지난해 수준에 한참 못 미치는 5700억원대에 머물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지만 결론적으로 밴드는 1조 478억원으로 결정됐다.

1~2000억원도 아닌 무려 2배 가까운 밴드가 하루 사이에 늘었고 건보공단과 공급자단체들을 들었다 놨다.

앞으로 발생할지 모르는 위기에 대한 불안감 때문에 환산지수 증가율을 잡아야하고, 건보재정 건전화를 이뤄야 한다고 주장하던 재정소위가 아무리 건보공단의 설득이 있었다 한들 하루새 2배가량의 밴드를 풀었다는 것은 17시간이라는 시간을 무색하게 만든다.

공급자단체→건보공단→재정소위→건보공단→공급자단체로 돌고 도는 무한루프 구조가 '수가협상'을 '수가흥정'으로 만들고 있는 원인은 아닐까. 

내년 비슷한 시기에 '협상'이 아닌 '흥정'이 끝났다는 표현을 사용하지 않으려면 재정소위가 공급자단체들 앞에 직접 나타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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