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한국의사들은 변화의 풍랑을 겪고 있다. 대중의 건강정보에 대한 욕구와 인터넷의 등장은 의사의 정보독점 시대에 종말을 고했다.

 환자들은 더이상 의사의 이야기만을 듣는 일방적 커뮤니케이션의 대상이 아니다. 전문지식에 대한 접근이 용이해지면서, 환자나 그 가족들은 병원을 찾기 전 인터넷을 통해 방대한 정보를 머릿속에 넣고 의사들을 대한다.
 팔순의 노할머니조차 "요즘은 거 뭐지, 당화 머시기가 중요하다던데. 그건 안하나"하며 혈당조절의 새로운 기준으로 자리잡고 있는 당화혈색소(A1C) 측정을 요구한다.

 한 의원 원장은 "최근의 당뇨병치료제 논란소식을 듣고 대체약물까지 스스로 제시하며 처방변경을 요구하는 환자때문에 애를 먹었다"고 한다.

 소득과 교육수준이 높아진 환자들에게 의사는 감히 이의조차 제기할 수 없었던 절대적 권위의 선생님이라기보다 소비자의 수요를 채워주는 공급자로 보여질 수도 있다. 또 한가지 중요한 변화는 환자들의 선택권이 강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본지의 설문에서도 "의료기관에 불만이 있을 경우 어떻게 대처했냐"는 질문에 "의료기관을 옮겼다"는 대답이 상당수를 차지했다.

 선택의 폭이 넓어진 한국의료.

 환자들은 이제 질적인 이슈, 즉 양질의 진료로 관심을 돌리고 있다. 한시간 이상 발품을 팔아서라도, 몇시간을 기다려서라도 대학병원으로 환자가 쏠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의료진의 질적인 측면이 고려된 것이 아닐까 싶다.
 의사들이 진료의 기술적 관점에서 질의 점수를 매긴다면, 환자들은 질환이나 증상에 대한 설명 등 의사의 커뮤니케이션 태도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상당수 환자의 불만은 설명이 이해가 가지 않거나 부족하다는데서 파생된다. 환자의 입장에서는 설명을 잘해주는 의사가 좋은 의사인 것이다. 설명만 잘해도 환자가 평가하는 진료의 질에서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다.

 진료의 질 향상을 위해 의사들이 관심의 끈을 놓치 말아야 하는 또다른 부문은 바로 시시각각으로 업데이트되는 의학지식이다. 어제의 명약이 오늘은 환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존재로 둔갑한다. 특정 질환의 일차선택제들이 속속 새로운 약물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임상현장의 의사들에게 진료의사 결정을 돕는 질병관리 가이드라인 역시 예전보다 빠른 속도로 개정되고 있다. 자칫 변화의 흐름을 놓쳤다가는 우물안 개구리가 되고 만다. 그리고, 이를 가장 먼저 알아 차리는 것은 바로 환자다.

 영국 요크대학 역사학과의 데이비드 우튼 교수는 그의 저서 "의학의 진실"에서 "의사는 2500년 전쯤부터 현재까지 면면히 이어지는 의학교육의 전통을 수립한 고대 그리스 히포크라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전문직업이지만, 놀라운 것은 그들이 사용한 처방들이 지난 100년을 제외한 전시기에 걸쳐 이로움보다는 해를 더 많이 끼쳤다는 것"이라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현대의학은 질병에 대해 아직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더 많다. 바로 이때문에 의사들은 새로운 지식과 견해에 늘 몸과 마음을 열어 놓아야 하며, 의학지식의 습득과 논의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의학교육이 CME(Continuing Medical Education)를 요구하는 것도 이때문이다.

 CME를 게을리 한 의사의 손에 쥐어진 메스는 경우에 따라 환자에게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다. CME를 소흘이 생각하는 의사의 처방은 경우에 따라 환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극약처방이 될 수도 있다. CME는 의사가 사회로부터 존경받아야 하는 이유인 동시에 그들이 다루고 있는 생명의 소중함을 되새기는 중요한 각성제다.

 이같이 급변하는 의학지식으로 인한 혼란을 막기 위해 등장한 것이 근거중심의학(Evidence Based Medicine)이다.

 이 개념은 임상시험 등 과학적 검증을 통해 타당성이 전반적으로 입증된, 즉 과학적 근거가 충족된 예방·진단·치료 기술을 임상에 적용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근거중심의학이 새로운 기준으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을 뒤집어 생각해 보면 현대의학이 최근까지도 과학적 검증에 근거하기 보다는 경험에 의한 치료에 의존해 왔다는 반증은 아닐까?

 근거중심의학은 환자의 권리와 의학지식이 크게 향상되면서 해당 진료의 근거를 원하는 환자들이 늘고 있는 국내에서도 큰 도움이 될 수 있다. 일선의 의사들도 그 개념을 명확히 이해하고 자신의 경험보다는 시시각각 입증되고 있는 과학적 증거들에 근거한 치료를 펼쳐야 할 것이다.

 이를 위해 평생 CME가 능동적으로 지속돼야 함은 더 말할 나위 없다.

 학계도 의사들의 교육에 적극 나서줘야 한다. 정부는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의료법개정안에서 임상진료지침안을 삭제했다.

 이제 공은 다시 의료계로 넘어 왔다. 과거부터 의료의 질 향상을 위한 임상진료지침 개발의 필요성이 의료계 내부에서도 제기돼 왔기 때문이다. 진료의 자율권을 침해하지 않으며 진료의 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안은 바로 의사에게서 나와야 하고 또 그럴 수 밖에 없다. 최근 대한순환기학회·대한당뇨병학회·대한내분비학회·한국지질동맥경화학회 등이 지질치료의 질 향상을 위해 근거중심의학을 근거로 보험급여 개정에 적극 나서고 있는 것이 좋은 본보기다. 이제 의사들이 진료의 질 향상을 위한 본격적인 행동을 보여줘야 할 때다.

 국민들이 지켜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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