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끝, 살아 숨쉬는 자연과 함께 한 행운



















고 경 남 공중보건의·해양연구소 부설 극지연구소


 솔직히 말하면, 난 모험이나 여행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1년간의 세종기지 근무를 다 끝마치고 귀국한 지금까지도 지구의 남쪽 끝에 내려갔었던 내 자신이 몹시 낯설게 느껴진다. 많은 친구들이 내가 왜 남극 세종기지에 지원했는지 궁금해 했다.

혹자는 공중보건의 배치시험 성적이 나빠서 그런 거 아니냐고 묻기도 했지만, 세종기지 경쟁률은 무려 5대 1이었다.

 세종기지에 대해서 알게 된 건 1년 먼저 파견됐던 친구 덕분이었다. 그 친구는 중학교 때부터 남극에 대한 꿈을 마음속에 품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그 친구만큼 확신에 찬 꿈을 얘기할 수 없었다.

 친구 따라 남극 간다는 얘기도 하고, 도 닦으러 그냥 멀리 떠난다는 얘기도 하고, 시끌벅적한 서울이 지긋지긋해졌다는 얘기도 하고….

 하도 여러 가지 이유를 대다 보니, 나 자신도 내가 왜 남극 근무를 지원했는지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문젠이 철두철미한 계획으로 승리를 거머쥐었고 스콧이 그 뒤에서 뜨겁게 죽어갔던 모험의 땅에 대한 잠재적인 동경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그 치열한 모험의 땅을 꼭 한 번 밟아보고 싶었다.

 세종기지의 환경은 아문젠과 스콧이 사투를 벌이던 때와는 사뭇 다르다. 세종기지는 남극점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기지의 제반 환경이나 보급 상황이 훌륭하기 때문에 생존이 불가능한 극한 환경이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의료 지원이 필요한 상황은 그다지 자주 생기지 않는다.

 흔히, 남극이라고 하면 동상 등의 한랭 손상을 먼저 떠올리겠지만, 기지 시설이나 방한장비가 충실하고 기상 상황이 좋지 않을 때는 외부 활동을 제한하기 때문에 한랭 손상은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강한 자외선에 일광화상 입기도

 오히려, 강한 자외선 때문에 남극에서 일광화상을 입는 아이러니컬한 일이 발생하곤 한다. 감기 걱정을 하는 경우도 많지만, 세종기지라는 곳이 외부와 철저하게 격리된 곳이기 때문에 바이러스를 옮길 만한 숙주가 없어서 감기 환자가 생기는 경우도 거의 없다.

 기지에서 가장 많이 발생하는 질환은 염좌, 타박상 등의 근골격계 손상과 가벼운 소화기계나 피부과 질환들로서, 대부분의 경우 의료담당 대원 혼자서 무리없이 해결할 수가 있다. 다만, 골절 등 수술이 필요한 경우에는 칠레로 응급 후송을 해야 되는데, 이런 경우에는 칠레 남극기지의 도움을 많이 받는다.

대원들 생활습관 관리가 중요 임무

 남극에서 문제가 되는 또 다른 의료 이슈는 일반 사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체중, 음주, 흡연, 식이 등과 관련된 "Lifestyle disease"이다. 규칙적인 생활, 적당한 운동, 과음 및 과식 금지, 금연 등이 건강 유지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은 남극이라고 해서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음주, 과음, 과식 문제에 있어서 한국에서보다 더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에, 현대 도시에서 발생하는 성인병이 남극에서 더 악화될 수도 있다. 따라서 대원들의 생활 습관을 관찰하고 교정을 돕는 것 역시 의료담당의 중요한 임무라고 할 수 있다.

 남극에서 의료 분야는 평상시에는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듯이 보여도, 막상 문제가 발생하면 어떤 분야보다도 절박한 문제가 된다. 따라서 유사시를 대비하여 의무실 설비와 의약품, 응급 의료 장비를 충분히 확보하고 철저하게 관리해야 한다.

 현재 세종기지의 의료 관련 설비는 사실 타 기지에 비해서 많이 부족한 상황이다. 다만, 주변 기지와의 협조가 용이하고 외부 이송이 가능하기 때문에 현재까지는 크게 곤란한 상황이 생기지 않았었다.

 하지만, 현재 남극 대륙 내부에 제 2기지 건설을 계획하고 있기 때문에 의료 시설 전반에 대한 재고가 필요할 것이다. 대륙 기지는 세종기지에 비해 훨씬 더 고립적이기 때문에 의료시스템 역시 충분히 독립적으로 가동될 수 있어야 한다.

 실제, 일본의 남극기지인 쇼와기지에는 두 명의 의사가 상주하며, 입원실과 수술실을 모두 갖추고 있다. 앞으로 공중보건의 숫자가 크게 줄어들 것으로 예상되는 상황에서, 남극에 두 개의 기지를 보유하게 된다면 의사의 수급 문제도 분명 중요한 이슈가 될 것이다.

 한국인에게 진취성의 중요한 상징인 세종기지에 대한 의료계의 관심과 지원이 앞으로 더욱 절실해 질 것이다.

 어느 새 1년의 근무가 모두 끝났다. 세상의 끝에서 놀라운 풍광들과 살아 숨쉬는 자연과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믿기지 않는 행운이었다. 의사에게는 많은 의무와 함께 다양한 선택의 기회가 주어진다.

 남극 근무는 아마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기회 중에 하나일 것이다. 앞으로 공중보건의가 될 후배 선생님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충분히 살펴보고 보람 있는 선택을 할 수 있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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