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美·유럽 "고혈압 가이드라인 독자노선 걷는다"
미국, 고혈압 진단기준 '강화'…한국, '주의혈압' 첫 제시…유럽, 1차 치료로 '복합제' 권고

바야흐로 '고혈압 가이드라인 춘추전국시대'다. 전 세계 고혈압 학계는 최근 10여 년간 정체된 고혈압 조절률을 높이고자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속속 내놓고 있다.가장 파격적인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곳은 미국이다. 지난해 미국심장학회·심장협회(ACC·AHA)는 고혈압 진단기준을 이전보다 강화한 '2017년 고혈압 가이드라인'을 공개해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겼다.이를 계기로 대한고혈압학회와 유럽심장학회·고혈압학회(ESC·ESH)가 각각 올해 5월과 6월 '2018년 고혈압 가이드라인'을 발표했으며, 일본 등 주요 국가에서도 진료지침 개정이 이뤄지고 있다.한국, 미국, 유럽 고혈압 가이드라인을 살펴보면 고혈압 조절률을 높이겠다는 목표는 같지만 여기에 도달하기 위한 세부 전략은 조금씩 다르다.미국은 높이고 한국·유럽은 유지하고가장 주목해야 할 권고안은 고혈압 진단기준이다. 기준에 따라 고혈압 유병률이 달라지며, 유병률 증가 시 막대한 사회·경제적 손실에 직면하는 만큼 진단기준을 변경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하지만 미국 심장학계는 고혈압 진단기준을 '140/90mmHg 이상'에서 '130/80mmHg 이상'으로 강화하며 대대적인 변화를 줬다. 이에 따라 미국 내 성인 인구의 고혈압 유병률은 32%에서 약 50%까지 치솟아 유병률 상승 문제를 피할 수 없었다.이러한 부담에도 불구하고 미국 심장학계는 미국 정부 주도로 진행한 SPRINT 연구와 900여 건의 연구를 체계적으로 문헌고찰한 결과를 통해 '혈압을 낮출수록 심혈관사건 및 사망률 감소에 도움이 된다'는 의학적 근거가 마련됐기에 강화된 기준을 적용하겠다는 단호한 입장이다.미국이 진단기준에 변화를 주면서 국내 및 유럽 고혈압 학계의 행보에도 관심이 쏠렸다. 특히 국내 고혈압 진료지침은 유럽 가이드라인을 수용·개작하고 있는 만큼 국내 고혈압 학계는 유럽의 결정에 촉각을 곤두세웠던 상황.결과적으로 국내 및 유럽 학계는 미국발 고혈압 '급행열차'에 탑승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천명했다. 진단기준에 대변화를 주기엔 아직 근거가 충분하지 않다는 점에 뜻을 함께한 것이다. 이에 우리나라와 유럽은 기존과 동일하게 '140/90mmHg 이상'을 고혈압 진단기준으로 유지하면서 미국의 기준 강화에 따른 고혈압 유병률 증가 및 치료율 저하에 대한 공포는 사그라들었다.대한고혈압학회 손일석 홍보이사(강동경희대병원 심장혈관내과)는 "지난해 미국 심장학계에서 고혈압 진단기준을 '130/80mmHg 이상'으로 제시해 큰 충격을 주었기에 유럽 가이드라인에서 가장 큰 관심을 불러일으킨 부분이 과연 고혈압의 정의를 어떻게 내릴까였다"면서 "ESH의 선택은 2013년 가이드라인의 정의와 같았다"고 설명했다.성균관의대 박경민 교수(삼성서울병원 순환기내과)는 "혈압은 낮추면 낮출수록 좋다고 하지만, 국내 데이터가 충분하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이 기준을 강화했다고 해서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어려움이 있다. 우리만의 기준을 적용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한국, 미국, 유럽 고혈압 가이드라인 비교.

각기 다른 혈압 분류 제시

다만 혈압 분류는 세 국가 간 차이가 있다. 미국과 우리나라는 '120/80mmHg 미만'을 '정상 혈압'으로 분류했으나 유럽은 이를 '최적(optimal)혈압'으로 명시했다.

유럽의 '정상혈압'은 '120~129/80~84mmHg'이지만, 이는 수축기혈압 기준으로 미국과 우리나라에서 각각 '상승혈압(120~129/80mmHg 미만)'과 '주의혈압(120~129/80mmHg 미만)'에 속한다. 

주의혈압은 국내 고혈압 진료지침에 처음 등장한 용어다. 2013년 진료지침에서는 고혈압 전단계를 1기와 2기로 나눴지만 이번 진료지침에서는 고혈압 전단계와 주의혈압으로 분류, 정상혈압보다 혈압이 조금 높더라도 가급적 혈압을 정상범위로 유지하도록 권고했다.

이화의대 편욱범 교수(이대목동병원 순환기내과)는 "정상혈압과 고혈압 사이에 속하는, 이른바 '중간 혈압'인 사람들은 향후 고혈압이 발병할 가능성이 높다"면서 "중간 혈압에 해당하는 이들도 혈압을 낮춰 심혈관질환을 예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와 함께 혈압 단계에 따른 고혈압 분류 틀은 세 국가 모두 다른 기준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은 △고혈압 1단계(130~139/80~89mmHg) △고혈압 2단계(140/90mmHg 이상)로 나눴다. 

우리나라는 △고혈압 전단계(130~139/80~89mmHg) △고혈압 1기(140~159/90~99mmHg) △고혈압 2기(160/100mmHg 이상) △수축기 단독 고혈압(140mmHg 이상/90mmHg 미만) 등으로 분류했다.

유럽은 더 세분화해 △정상보다 높은 혈압(130~139/85~89mmHg) △고혈압 1단계(140~159/90~99mmHg) △고혈압 2단계(160~179/100~109mmHg) △고혈압 3단계(180/110mmHg 이상) △수축기 단독 고혈압(140mmHg 이상/90mmHg 미만) 등으로 제시했다. 

유럽 '120/70mmHg' 하한치로 제시

목표 혈압은 세 국가 모두 기존보다 '강화'했다는 공통분모가 있다. 미국은 고혈압 환자의 목표 혈압을 130/80mmHg 미만으로 권고했다. 심혈관질환 고위험군뿐만 아니라 일반 고혈압 환자, 당뇨병, 만성 콩팥병 동반 환자에게도  일괄 적용했다는 게 주요 특징이다. 게다가 노인 고혈압 환자의 목표 수축기혈압도 SPRINT 하위분석을 근거로 노쇠 여부와 관계없이 130mmHg 미만으로 철저하게 낮추도록 주문했다.

목표 혈압을 일반화한 미국과 달리 우리나라와 유럽은 환자군의 특징에 따라 목표 혈압을 세분화했다. 

국내 고혈압 진료지침은 적극적인 혈압 조절을 강조하면서, 심혈관질환 위험도가 높은 환자 또는 심혈관질환을 동반한 당뇨병 환자의 혈압을 130/80mmHg까지 최대한 낮추도록 권고했다. 노인 고혈압 환자의 목표 혈압도 2013년 140~150mmHg로 조절하도록 제시한 것과 달리 이번 진료지침에서는 일률적으로 140/90mmHg 미만으로 조절하도록 했다.

다만 심혈관질환 고위험군 전반에 걸쳐 미국이 130/80mmHg 미만의 목표 혈압을 제시한 점에 대해서는 근거가 명확하지 않아 혈압 강하에 따른 실익이 없다고 판단했다.

유럽도 목표 혈압을 강화했다. 대부분 고혈압 환자의 목표 수축기혈압은 130~140mmHg로 제시하면서 65세 미만의 환자는 130mmHg 미만으로 강력하게 조절할 것을 명확히 했다. 65세 이상의 노인 고혈압 환자의 목표 수축기혈압은 130~140mmHg로 권고했다. 2013년 가이드라인에서는 이들의 목표 수축기혈압을 140~150mmHg로 제시한 점을 비춰보면 큰 변화를 준 셈이다. 

이에 더해 유럽은 가이드라인 최초로 '혈압 조절 하한치'라는 새로운 개념을 도입했다. 과다 치료에 따른 부작용이 동반될 수 있어 '120/70mmHg'를 하한치로 제시하면서 약물을 서서히 단계적으로 감량하는 'step down therapy'를 고려하도록 조언했다. 

항고혈압제 병용요법·복합제 '전성기'

고혈압 가이드라인이 개정되면서 항고혈압제 병용요법과 복합제는 전성기를 맞았다. 혈압이 적정 수준으로 조절되지 않았음에도 약제를 변경 또는 추가하지 않는 '치료태만(Therapeutic inertia)'을 극복하고자 세 국가의 치료전략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미국은 심혈관질환 고위험군인 고혈압 환자의 혈압이 140/90mmHg 이상이면 치료 초기부터 항고혈압제 병용요법을 적용할 수 있다고 제시, 약물치료 강도를 높이고 치료 시기를 앞당겼다. 

우리나라는 항고혈압제 병용요법을 치료 초기부터 적용할 수 있다고 명시했다. 다만 혈압을 한 번만 측정해 병용요법을 시작하면 이득보다 위험이 더 크기에, 여러 번 측정한 혈압이 160/100mmHg 이상이거나 목표 혈압보다 20/10mmHg 이상 높은 경우에만 병용요법을 시작할 수 있다고 단서를 달았다.

그러나 유럽은 고혈압 환자의 1차 치료부터 복합제를 권고하면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약물치료를 시작해야 하는 적정 혈압보다 약간 높거나 노쇠한 노인 고혈압 환자를 제외하고, 모든 고혈압 환자에게 항고혈압제 병용요법을 강조하면서 순응도 개선을 위해 복합제를 권고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심혈관질환 저위험군인 고혈압 1단계 환자는 80세 이상의 고령자만 단일제로 치료를 시작하고, 그 외 환자들은 레닌안지오텐신계(RAS) 차단제/칼슘차단제(CCB) 또는 이뇨제를 결합한 복합제로 시작하기를 권유했다. 

게다가 RAS 차단제/CCB/티아지드계 또는 티아지드계 유사 이뇨제를 합친 3제 복합제를 1차 치료로 처음 제시했다. 3제 복합제가 24시간 균등하게 혈압을 조절할 수 있는지 확실하지 않은 상황에서 너무 일찍 3제 복합제의 효용성을 인정해 제약사의 입김이 반영됐다는 비판을 피해갈 수 없었다.

박경민 교수는 "항고혈압 복합제를 복용하면 혈압이 잘 조절된다고 보고되면서 2제, 3제 복합제를 개발하고 있는 제약사들이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리고 있다"면서 "고혈압 환자 입장에서는 복용해야 하는 약의 개수가 늘지 않고 혈압이 조절돼 긍정적이다. 하지만 혈압은 최대한 생활습관 교정으로 조절해야 한다. 복합제로 혈압을 빨리 강하게 낮추면서 이에 따른 문제가 나타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연세의대 박성하 교수(세브란스병원 심장내과)는 "항고혈압 복합제를 복용한 환자에서 이상반응이 생기면 약제 조절이 쉽지 않다"며 "우선 병용요법을 적용해 혈압이 잘 조절되고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복합제로 변경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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