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센텀병원 장재영 병원장

▲ 장재영 병원장

한국의 나폴리로 불리는 경남 통영을 지나 거제도로 진입하려면 신거제대교를 꼭 지나야 한다. 그길로 곧장 송정 방면으로 10여분 달리다보면 옥포항 못미쳐 큼지막한 시내가 나오는데 그곳 대로변 옆에 거제센텀병원이 우뚝 위치하고 있다.

거제센텀병원은 거제도 옥포지역에서는 몇 안되는 입원실 있는 병원급 의료기관이다. 내과계 질환은 물론이고 직장건강검진, 정형외과, 암검진(내시경), 신장투석도 가능하다. 직원도 60여명에 달한다.

든든한 병원이 있어 섬주민들에게는 안식처 같은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는 늘 밤늦게까지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환자 차트를 정리하고 있는 장재영 병원장이 있다. 그는 얼마전 병원을 인수하면서 더 바쁜 삶을 살고 있다.

장 병원장은 외형적으로 유복한 환경에서 평범한 길을 걸어온 의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외딴 시골인 의령에서 태어난 그는 원래 공학도를 꿈꾸는 청년이었다. 어렵게 부산대 공대에 진학한 것도 잠시. 적성에 맞지 않다는 판단은 결국 그를 의사의 길로 이끌었다.

결정적인 계기는 제대 후 복학할 즈음 삼촌이 제대로 된 치료도 못받고 폐결핵으로 운명을 달리한 것이다. 이 때의 충격으로 그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의사가 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하지만 생각만큼 공부는 되지 않았다. 게다가 경제적인 어려움은 그를 더욱 혼란에 빠뜨렸다. 결국 그가 선택한 진로는 세무공무원이었다.

그러나 가게를 돌며 하루 매출로 세금을 매기는 등 후진적인 탁상행정을 경험한 순간 내길이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다시 의사의 욕망이 불타올랐다. 그 길로 의대 진학공부에 재도전했다.

"의대에 미련이 계속 남아 있는 상태였지만 결혼도 했고 아이도 있었던 상태라 마지막 도전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가족들의 반대가 심해 그는 혼신을 다해 죽기살기로 책을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청년 장재영은 29세 나이에 경상의대에 들어갔다.

기쁨도 잠시. 어렵게 들어간 의대는 철저한 계급사회였다. 새까맣게 어린 고등학교(당시 진주고) 후배를 선배로 대해야 했고, 모욕적 언행과 폭력도 감당해야 했다. 나이 많은 학생으로는 감당하지 힘든 부분이었다.

그러나 의사가 되겠다는 신념앞에서 문제는 되지 않았다. 오히려 자존심을 버리고 더 치열하게 공부했다. 그는 의예과 6년을 모두 장학금을 받으며 그간 받은 수모를 공부로 발산했다. 그 후 수련은 창원삼성병원을 선택했다. 수련과정까지 후배들에게 고개숙이고 싶지는 않았다.

이 과정에서 내과로 방향을 잡았다. 내과를 선택한 이유는 의대생때부터 내과 노인질환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전문의 자격을 딴 후 그는 창원삼성병원을 떠나 거제대우병원에서 첫 봉직의를 시작했다.

당시 창원삼성병원에 펠로제도가 막 생겨 남아달라는 부탁도 있었지만 서울 본원에서 1년동안 파견근무를 해야 한다는 조건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워 고사했다. 그러던 중 거제대우병원에서 제의가 들어온 것이다.

이때부터 그의 거제생활은 시작됐다. 거제대우병원은 노인환자가 많았고, 대부분 농부였다. 자신도 농부의 자식이었고, 그들처럼 가난하게 살아왔다는 동질감을 느끼면서 직업의 귀천없이 환자를 진료했다.

"야간, 휴일 진료 보상이 없어도 필요하면 성심껏 진료했고, 때로 사정이 어려운 환자가 올 때면 진료비까지 생각했어요.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냐는 시선도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마음이 전해졌는지 환자들도 저를 많이 따랐습니다"

그의 성실성과 확고한 의사 신념은 지역병원에서 금새 소문났고, 그 덕에 두 번의 스카웃을 거쳐 지금의 자리까지 온 것이다. 거제센텀병원은 진료과장으로 왔지만 지금은 오너다. 경영문제로 부도위기에 몰린 병원을 인수한 것이다.

"아무리 잘한다고해도 사람이기 때문에 불화는 언제든지 생길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나를 믿고 따랐던 환자들은 또다시 새로운 병원을 찾아야 하는데 그런 점이 너무 미안했죠. 끝까지 환자들에게 신뢰를 주려면 정착할 병원이 필요했기에 결정한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인 문제는 돈이다. 말이 인수지 사실상 천문학적인 부채를 떠안고 있는 셈이다. 그러나 착실하게 운영하면 문제가 없을 것으로 확신했고 그런 믿음으로 지금까지 순항하고 있다.

장 병원장은 진료에만 집중하고 행정 및 회계 부분은 전문가에 맡기며 철저히 분리하고 있다. 그는 병원인수로 큰 돈을 벌겠다는 욕심도 없고 게다가 의사로서 출세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고 말한다.

"단 질높은 진료를 제공해야 한다는 목표는 있습니다. 고가 진료를 하면 돈은 많이 벌겠지만 결국은 손해입니다. 저는 15년을 그렇게 진료해왔고 또 앞으로 20년은 더 일해야 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어리숙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손해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같이 가는 세상이잖아요"

작은 활력소는 그의 손길을 거쳐간 환자들이 감사인사를 보내줄 때다. 젊은 시절 대장암을 초기에 발견해 준 것이 계기가 되 명절이면 선물을 보내오는 사람, 매번 차비를 빌려가는 환자가 어느 날 명절에 멸치를 보내주는 것도 그에게는 모두 감동으로 전해진다.

장 병원장은 휴대폰 번호를 환자에게 주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문자를 통해 전해오는 환자소식도 반갑기 때문이다. 그 밖에 자원봉사자와 고교생 멘토에게 받는 문자메시지에서도 기쁨을 느낀다.

"언제든지 전화하라고 합니다. 환자들에게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의사가 있다는 것 자체로 큰 힘이 된다면 만족합니다. 얼마 전 멘토 학생이 의대에 진학했다고 연락이 왔는데 자랑스럽더라고요"

올해 장원장의 나이는 52세. 앞으로 20년 더 의사행활을 한다고 가정하면 남은 인생도 지금처럼 변함없이 보내겠다는 입장이다.

"이 나이에 변할 게 있습니까. 사람은 똑같습니다. 사람 위에 사람없고 사람 밑에 사람없습니다. 저 역시 운이 좋아서 의사가 된 것이죠. 저는 진료를 하는 사람이고 환자는 아픈 사람일 뿐이죠. 이것만 생각한다면 변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병원의사로서 성공했지만 가족 구성원으로서는 아쉬움이 많다. 아이가 하나 있는데 어릴때 의대에 들어가면서 11년간을 거의 떨어져 있었던 것. 특히 아이 사춘기와 수련의 과정이 맞물려 사랑을 많이 주지 못했고, 그 사이 간격이 너무 많이 벌어졌다고 말한다.

"아이가 성인이 됐으니 어느 정도 아빠를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환자를 생각하듯 앞으로 남은 시간은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 장 병원장이 의사와 아버지로서의 성공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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