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자극 느끼면 다른 감각은 의식 밖으로

 아픔은 언제나 주관적이다. 누구나 손상을 일으키는 자극을 받은 경험이 있다면, 이를 통하여 아픔이 생기는 자극을 기억하게 되고 또 그 자극은 조직의 손상을 야기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따라서 아픔은 실질적 또는 잠재적 조직손상을 연상할 때도 생길 수 있다.
 그것은 불쾌하기 때문에 아픔이 되지만 만일 그것이 불쾌하지 않은 경우에는 이를 아픔이라 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아픔이란 언제나 심리적 상태와 연계되는 것이다.
 따라서 통증의 물질적 기초는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으나 통증의 수용은 개인에 따라 많은 차가 있다. 예를 들어 운동선수가 경기 중에 부상을 당해도 그것에 대한 통증은 전연 느끼지 못하고 있다가 경기 후에 비로소 통증을 느끼는 예는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본다. 이러한 사실을 잘 표현한 그림이 있다.
 미국의 화가 조지 벨로스(George Wesley Bellows, 1882~1925)는 20세기 초 미국 서민층의 활력과 에너지를 가장 잘 표현한 화가중의 한 사람인데 그가 그린 `뎀시와 피르포`(1924, 뉴욕, 휘트니 아메리칸 미술관, 그림 1)는 권투시합의 한 장면을 그린 그림이다.
 흰 트렁크를 입은 권투선수 뎀시가 보라색 트렁크를 입은 피르포의 주먹에 맞아 링 밖으로 떨어지는 장면을 그렸는데 뎀시는 많이 맞아 정신이 얼떨떨할 지경에 빠졌지만 관중들의 응원에 의해 링으로 다시 올라가게 되었다.
 사실 뎀시는 이 시합이 있기 전에 7번이나 피르포를 다운 시킨 경험이 있기 때문에 관중들의 열광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정신을 차린 뎀시는 다음 라운드에 피르포를 다시 다운시켜 이겼다. 이 시합을 관전하던 화가는 그 기 막힌 장면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다.
 시합이 끝난 뒤 뎀시의 몸에는 손가락의 탈구와 골절 등 많은 부상을 입어 평상시라면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정도였는데도 이를 느끼지 못하고 시합을 계속했으며 그 후에는 부상으로 인한 통증 때문에 오랜동안 고생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시합 후에 아픔을 느끼는 현상은 그 개인에 있어서도 때와 장소에 따라 그 아픔을 의식하는 정도에는 차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즉, 고통의 수용은 개인의 노력으로 바꿀 수도 있는 것으로 그 실천은 수행(修行) 또는 도(道)를 닦는 것으로 체계화 되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아픔을 느끼지 못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이가 쑤시고 아플 때 갑자기 태풍이 불어오거나, 아픔으로 사지가 마비되다 시피하여 입원하고 있던 류마티스 환자가 화재가 나서 "불이야!" 하는 소리에 그만 펄떡 일어나 도망치는 일들을 보게 되는데 이것은 주의가 다른 것에 쏠리면 아픔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은 느끼질 못하게 된다. 즉 위기가 닥쳐 흥분되면 아픔을 잊게 되는 것이다.
 몬트리올 종합병원을 찾은 응급환자 138명중 37%가 부상 당할 때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는 보고가 있다. 즉 찰과상이나 화상 및 얕은 절창(切創)과 같이 그 손상이 피부에 극한 되어 있을 때는 53%의 환자가 통증을 느끼지 못했으며, 골절, 염좌, 자창(刺創) 및 심부의 좌상 등과 같이 손상에 범위가 보다 깊은 경우에는 환자의 28%가 통증을 느끼지 못했는데 대부분의 환자는 수상시간으로부터 1시간 이내에 통증을 느꼈는데 개중에는 몇 시간 후에야 통증을 느꼈다는 환자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부상을 입고서도 그 현장에서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것을 더욱 실감 있게 이야기하는 것은 전투에 참가했던 군인이 적탄에 허벅지를 맞고서도 전투를 계속하다가 적군이 퇴각하여 전투가 끝난 후에 옷의 허벅지 부분이 피로 물들어 있어 비로소 자기가 총탄에 맞은 것을 알게 되는데 그전까지는 전연 아픔을 느끼지 못했다는 이야기는 자주 듣는 전투 경험담이다.
 이런 현상을 Wall(2001)은 `한번에는 단 하나(one thing at a time)`라는 동통의 기본 원칙으로 설명한다.
 즉, 사람이 주의하게 되는 것은 그 개체의 생존이나 보다 좋은 상황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한 것인데, 그것도 `한번에는 단 하나`라는 원칙이 적용 된다는 것이며, 아픔을 느낀다는 것은 인간의 뇌가 적당한 반응행위를 결정하는 상황을 분석한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강한 정동적인 자극을 받아 그것이 그 사람의 의식의 전부를 차지하게 되면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즉 강한 아픔을 느낄 때는 다른 감각은 의식 밖으로 밀려나게 되고 반대로 강한 정동적인 자극이 가해지면 아픔이 의식 밖으로 밀려나기 때문에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탈리아의 화가 라파엘로(Sanzio Raphael 1483-1520)가 그린 `보르고(Borgo)의 화재`(1514-17, 로마, 바티칸 미술관, 그림 2는 `보르고의 화재`의 부분 확대)라는 그림은 불이 난 화재현장의 긴박하고 수라장이 된 상황을 우리에게 잘 전해 준다.
 불이 난 현장을 피하기 위해 사람들은 자기 있는 힘을 다해 탈출을 시도하고 있다. 이 때 높은 데서 뛰어내리면 몸의 모든 뼈에 골절을 입기 쉽다. 그러나 이렇게 골절을 입고서도 사람들은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더 다급한 불길을 피하는데 혈안이 된다.
 즉, 주의는 두 개의 요구(아픔과 도피)를 저울질 하여 도피가 완전히 우세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되고, 그 후에 상황이 달라져 안전하다고 느껴지면 골절이 정점(頂點)에 서게 되면 주의는 아픔 쪽의 손을 들어주게 된다. 이러한 `한번에는 단 하나`의 원칙은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자주 보는 현상으로 이를 주의전환(注意轉換)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피부가 온몸 전체를 덮고 있으며 그 감각은 표현활동의 전 영역에 표출되고 있다. 그렇다면 시각예술로서의 그림이나 청각예술로서의 음악에 대응할 수 있는 하나의 표현형식을 촉각(觸覺)에서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인체의 촉감에서 우러나는 예술은 참으로 다양하기 때문이다. 즉, 모든 촉각이 집중되는 손으로 이루어지는 예술은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종래의 생각에는 인간의 정신 활동에 있어서 피부는 신체의 표면을 덮고 있을 뿐 본질이 아니며 본질은 깊숙한 곳에 있는 뇌에 있다고 생각하여 왔다.
 촉각 문화를 내세우기 위해서는 피부를 단순한 보자기로 보아서는 안 되며 피부를 말단으로 생각해서도 안 될 것이다. 피부는 뇌의 연장으로 또 뇌는 피부를 말아 올린 피부로 생각할 때 아픔을 중심한 촉각문화가 탄생될 수 있지 않겠나 생각해 본다.



◇문국진 박사 약력
△고려대 명예교수
△대한민국 학술원 자연과학부 회장
△대한법의학회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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