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절망에 짓눌린 인간 그려낸 `뭉크`

 미술관에 결려있는 작품은 대부분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 그것이 비록 전쟁이나 순교와 같은 피범벅이 된 장면을 묘사하거나, 지옥 또는 악마와 같이 무서운 것을 다룬 그림이라 할지라도 일단 미술관에 전시되었다면 마치 우리 안에 든 맹수와 같은 느낌이 들어 불안은 사라지고 안도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때로는 그 작품이 비록 전시장에 진열된 것이지만 보는 이들에게 불안을 느끼게 하는 그림도 있다.
 노르웨이의 화가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그림은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절망을 통해서 인간의 위기의식을 극대화한 것이 많다. 그중에서도 `절규`(1893)라는 그림은 다리 난간에 홀로 서서 양쪽 귀에 손을 대고 몸을 휘면서 괴로워 소리 지르는 마치 해골 같은 인간은 필사적으로 무엇인가 구원을 요청하는 듯한 그림이다.
 하늘은 붉은 핏빛이다. 하늘의 구름은 악몽을 메아리 치듯 검푸르게 변하며 강에 녹아내리고, 부드럽게 소용돌이치는 강물과 하늘의 평면은 날카로운 직각으로 잘려 있다. 또 친구라는 두 사람들은 주인공으로부터 멀리 사라지고 있고, 그리고 협만(峽灣)에 떠있는 돛배들도 작게 축소돼 절규하는 인간은 완전히 고립되어 그의 고독을 더욱 증폭시키는 것 같다.
 그래서 이 그림 앞에 서면 마치 눈에 보이지 않는 전파에라도 감촉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 그림은 비록 미술관에 전시된 것을 관람한다 해도 불안감을 떨칠 수가 없다.
 이 그림은 화가 자신의 체험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그의 일기(1892)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다.
 "두 친구와 같이 길을 거닐고 있었다. 해가 저물었다. 나는 우울함을 느꼈다. 갑자기 하늘이 붉은 핏빛으로 변했다. 나는 우뚝 서 버렸다. 죽을 것 같이 피곤해 난간에 기댔다. 그리고 검푸른 도시의 협만에 걸린 타오르는 핏빛 구름을 보았다. 친구는 계속 걸어가고 나는 그 자리에 서서 무서움에 떨었다. 그때 자연을 관통하는 그치지 않는 커다란 비명소리를 들었다."
 뭉크의 이 일기에서는 `자연을 관통하는 비명`이라고 기술하였지만, 다른 글에서는 `자연(안)의 커다란 비명` 혹은 `자연을 가로지르며 울리는 비명소리` 등으로 기술하고 있는데 실제 그림에서 자연은 사납게 광란의 소리를 낼만한 현상은 찾아 볼 수 없다.
 멀리 협만에 보이는 배는 잠든 것처럼 잔잔한 물위에 떠있고, 하늘은 밝게 노을에 물들어 있어 사람에게 위해를 끼칠 요소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뭉크는 이렇게 평화스러운 자연을 놓고 불안을 느꼈다는 것은 과연 그 정체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뭉크는 많은 종류의 뿌리 깊은 두려움을 안고 살았다. 낯선 사람에 대한 두려움, 여인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질병과 세균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무엇보다도 텅 빈 공간에 대한 두려움 등등 사실 그는 발작성을 동반한 광장 공포증을 앓고 있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광장 공포증에는 불면증과 가슴의 통증 그리고 격렬한 감정의 변화 등을 수반하게 되고 또 그가 자주 겪었던 알코올 중독 역시 이러한 정신적 불안정의 요소가 된다.
 결국 이 작품은 그 자신의 상처받은 삶을 직접 반영한 것이다. 즉 그가 5세 때 어머니가 동생을 낳고 얼마 후 결핵으로 사망했으며, 1877년에는 여동생 소피가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1895년에는 또 다른 동생 안드래아스마저 죽었다.
 그 자신도 매우 병약했는데 그는 결핵뿐만 아니라 만성 천식성 기관지염과 심한 류머티즘을 앓았다. 또 여동생 로라는 후에 우울증 진단을 받고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쳤다. 이러한 가족력으로 뭉크는 무엇에 홀린 듯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일기에 "나는 매일 죽음과 함께 살았다. 나는 인간에게 가장 치명적인 두 가지 적을 안고 태어났는데 그것은 폐병과 정신병이다. 질병, 광기 그리고 죽음은 내가 태어난 요람을 둘러싸고 있던 검은 천사들이었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 무렵 뭉크가 자신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잘 알고 있었다는 것은 작품의 맨 위에 가늘게 써놓은 문구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거기에는 `광인에 의해서만 그려질 수 있는 작품`이라고 적혀있다(이 문구를 정말 뭉크가 적어놓은 것인가에 대한 논란이 있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1905년의 어떤 글에서는 `몇 년 동안 나는 거의 미쳐 있었다. 그때 광인이 무시무시하게 뒤틀린 얼굴을 내밀었다. 여러분도 나의 그림 `절규`를 알고 있겠지만, 당시 나는 극단적인 상황에 몰려 있었으며 내 피 속에서는 자연이 절규하고 있어 나는 터질 것만 같았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그가 이야기한 `무시무시하게 뒤틀린 광인의 얼굴`을 그는 `절규` 그림에 묘사했는데 그 해골처럼 보이는 인물의 얼굴은 잉카문명의 유적지에서 발견된 미라의 얼굴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그 미라는 마치 태아가 어머니 자궁 속에 있을 때와 같은 자세로 항아리 속에 넣어 매장되었던 것을 발굴했는데 제시된 그림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작품의 얼굴은 미라의 얼굴 그대로이다.
 특히 이 미라가 보관 전시되고 있던 파리의 인류 박물관(당시 트로카데로궁)에 뭉크나 고갱 등 당시 젊은 화가들이 방문하였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에 그럴 가능성을 뒷받침 한다.
 뭉크가 살던 19세기 말은 죽음의 본질에 관한 문제로 고민했던 시대이다. 즉, 생명의 신비, 예고 없이 닥치는 죽음, 배반의 괴로움 등은 그 시대를 살았던 젊은이들이 갖고 있던 공통된 고민이었다.
 이러한 개인적 및 시대적 배경을 업은 그림 `절규`에는 정신적인 타격을 하나의 심리학적 상징으로서의 인간을 장승 푯말처럼 다리 위에 외롭게 서있게 표현했고, 목청을 높여 소리 지르는 인간조차도 파도치는 구름과 강물의 리듬처럼 주위 환경에 동화되어 버리며, 그리고 하늘과 다리 밑 협만의 물결도 악몽처럼 메아리침을 나타내어 개인적인 고민, 공포와 시대적인 불안, 절망이 함께 공존함을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뭉크는 그가 남긴 글에서 "나는 숨쉬고, 느끼고, 사랑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그리고 싶다"라고 자기의 심정을 털어놓았는데 이것은 자기가 정신적인 고독과 공포를 느끼게 하는 불안하고 절망적인 현대사회에 대한 절규이며 경고라고 해석된다. 자신의 가족력의 침울함을 통해 사회의 병리적 현상을 화폭에 담은 그의 그림을 평론가들이 무시했으나 `인형의 집`으로 유명한 입센만은 그를 열렬히 옹호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뭉크의 그림은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과 문화적 해석을 접목시키면 그 주제는 더욱 강렬한 전달력을 지니게 되는 것 같다.
 인간은 결코 고독, 공포, 죽음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이 `절규`에서 그 기괴함의 심리적 변주를 통해 다가온다. 죽음에서 삶을 보듯, 고독과 공포, 불안과 절망을 통해 현실을 보아 터져나는 절규야 말로 오늘날 사회에 있어서의 가족의 중요성, 삶의 건전성, 공동체의 유대를 강렬하게 환기시키는 외침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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