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능력 보유국 몇안돼…풀가동해도 겨우 5억명분

"펜데믹 감염질환 창궐 시간문제" 경고 잇따라

 "전세계적 유행성 인플루엔자(pandemic influenza)의 시한장치는 이미 작동을 개시했다. 다만, 언제 폭발할지 모를 따름이다."(Ed Marcuse, 전 미국국립백신자문위원회 위원장)
 "세계는 지금 펜데믹 감염질환 출현이라는 가장 심각한 위험에 직면해 있다. 최근들어 전세계적으로 전염될 수 있는 펜데믹 출현의 가능성이 그 어느때 보다도 높아지고 있다."(Shigeru Omi, WHO 서·태평양 지역 담당관)
 "현대문명의 변화요인이 상호작용할 경우 퍼펙트 스톰과 같은 펜데믹 수준의 유행성 감염질환이 출현할 수 있으며, 이는 발생 가능성 보다는 시간의 문제다."(Michael T. Osterholm, 미국 보건성 신종 전염병 자문위원)
 1991년 미국 메사추세츠주 글로스터 지역에는 대서양 연안에서 시발된 세 개의 폭풍이 하나로 합쳐져 거대한 해일이 몰아쳤다. 사람들은 이를 `퍼펙트 스톰(perfect storm)`이라 부른다. 누구도 대항할 수 없는 지구상 최대의 폭풍이었다는 의미다.
 신종 전염병 분야의 세계적 전문가로 알려진 마이클 오스터홈 교수는 최근 한국에서 열린 항생제와 감염질환 관련 국제 학술행사에 참석해 "인구확산, 국가간 여행 및 무역확대, 미생물의 환경적응과 변이, 기후·생태계 변질, 가난과 사회적 불평등, 감염에 취약해 지는 인류 등 현대문명이 야기한 사회·문화·환경적 변화요인들이 동시에 상호작용할 경우 퍼펙트 스톰과 같은 완벽한 유행성 전염병이 창궐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지난 2003년 사스(SARS) 창궐 이후 전문가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제기돼 온 펜데믹 관련 발언에는 한가지 공통점이 있다. 이들 모두 향후 수백만의 사망자를 야기할 수 있는 유행성 전염병이 창궐할 것이라는 점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과거 펜데믹 인플루엔자 출현이 일정한 주기를 나타내고 있으며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비롯한 고병원성 미생물들이 빠르고 반복적인 변이를 거듭한다는 점을 들어 코앞으로 다가온 대재앙의 위험을 주장해 왔다.
 하지만, 이같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일부 선진국들의 개별적 대책을 제외하고 아직까지 전세계적인 공조의 움직임은 이렇다 할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다. 전염병 감시 및 조기경보체계는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꼽히는 동남아시아나 아프리카 등지에 힘을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백신 및 항생제 개발기술과 대량생산 능력은 여전히 획기적 발전을 이뤄내지 못한채 세계적 수준의 유행성 전염병 발생시 유일한 대응책으로서의 핵심역할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 당장이라도 H5N1 바이러스가 인간 대 인간 감염의 펜데믹 수준으로 변이한다면, 인류는 14세기 유럽이 흑사병에 당했던 것 처럼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다는 자조섞인 우려가 팽배하는 이유다.
 오스터홈 교수는 `NEJM(2005;352:1839-1842)` 최근호에서 "인류는 향후 다가올 펜데믹에 준비가 돼 있는가?"라는 물음과 함께 "펜데믹 창궐이 기정사실임을 인정하고, 대책을 서둘러야 할 때"라고 역설했다.
 그는 우선 현재의 백신 개발기술과 생산능력으로는 65억 인구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18세기 백신이 처음 등장한 이래로 21세기 현대문명은 여전히 달걀배양을 통한 백신개발에 의존하고 있다. 주판에서 컴퓨터로 이어지는 비약적 변화에 비하면 백신 분야는 여전히 걸음마 단계인 것이다. 오스터홈 교수는 이 기술로는 다량의 백신개발을 보장할 수 없다며 보다 많은 항원을 신속하게 얻어낼 수 있는 세포배양 기술을 통한 대량생산 시스템으로 속히 전환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백신생산 기술과 설비가 일부 지역에 집중돼 있으며, 전세계 인구를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인 생산능력 또한 문제다. 전세계에 공급되는 백신의 85%는 미국·캐나다·호주 및 서유럽 6개국 등 선진국에 소재한 거대기업들에 의해 생산돼 왔다.
 새로운 펜데믹 인플루엔자 발생시 현재의 기술로는 적어도 백신개발에 6개월 이상이 소요된다. 개발에 성공해 모든 생산능력을 동원한다 해도 전체 인구의 14%에 해당하는 5억명(10억 도스)분만이 가능하다는 것이 오스터홈 박사의 설명이다. 백신이 개발되는 동안 인플루엔자 진앙지를 중심으로 세계적 교역 및 여행의 단절은 이미 사스를 통해 경험했다.
 특히, 백신이 정치적 이해관계와 얽히게 될 경우 공급 불균형으로 인해 심각한 사태가 도래할 수도 있다. 미국국립백신자문위원회 위원으로 일한 바 있는 페드손 박사는 펜데믹 인플루엔자가 예고없이 닥치게 되면 백신설비를 갖춘 국가들은 우선적으로 자국내 모든 연령대의 국민들을 대상으로 백신공급을 늘려야 할 것이며, 이는 곧 여타 지역으로의 백신수출이 급격히 감소되거나 중지될 수 밖에 없음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이 경우 백신, 특히 인플루엔자 백신의 자급능력이 없는 우리나라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된다.
 이와 관련 충북의대 종양연구소의 최중국 박사는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백신은 이제 단순한 약이 아니고 석유나 식량보다 중요한 무기가 될 수 있어 다른 나라에서 얻어 쓰는데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고대의대 감염내과의 김우주 교수 또한 "전염병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할 수 있는 백신 생산능력을 확보하는 것은 국가적으로 매우 시급하고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그렇다면 한국의 백신 공급현황은 어떠한가? 2003년 사스 대란시 감염자가 단 한명도 없었다며 김치의 효능을 1등 공신으로 대내외에 자랑했던 우리나라는 펜데믹 인플루엔자 창궐시 백신과 항생제를 통해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인가? 다음호에는 국내 백신공급 실태와 향후 전망 및 대책을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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